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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광장

금강지(錦江誌)에 담겨진
금강의 인문환경

안상진

안상진
18대 회장,
원로회의 13, 14대 의장
국제 도시 물정보과학
연구원 고문
충북대 명예교수
하천물문화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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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강 유역의 지리적 개관

가. 금강의 지역구조

금강유역은 고대사회 이래로 한국문화의 요람을 이루었고, 개항 이후로는 타의 개입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수운문화권을 형성해온 터전이며, 그 변천과정이나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학구적 잠재성은 비단지리학뿐 아니라 자연-인문-사회과학등 여러학문분야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금강은 동진강 만경강과는 황해안에서 만나며 서해안의 조석간만의 차와 아울러 넓은 간석지와 유역의 범람원이 발달되어 있어 미곡생산을 위한 토지이용과 개발의 터전이 되어왔다.
지역구조는 한지역내의 자연인문 지리적으로 여러 가지요소의 짜여진틈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구조는 사회경제구조와 공간구조의 둘로 구성되며 지역구조 발생, 기능, 형태등 모든측면에서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목내신장,1968)
어떤지역의 공간구조가 사회경제 구조와 서로 어떻게 기능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발생한 다음 어떻게 변천하여 왔는가?
그리고 이러한 변천과정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가를 파악함으로서, 지역구조라는 복합적인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금강유역의 지역구조는 1899년 군산이 개항된 이후(일본식민지시기를 통하여)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에 공간구조가 식민지적 사회경제 구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발달하여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경관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군산이 개항되기 이전에 금강유역에서 재회와 서어비스 유통경로의 중심은 부강으로부터 강경을 거쳐 군산에 이러는 수로 주변이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기 이전의 강경포는 그 중간에 있어 금강유역에서 재회와 서비스가 유통되는 데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공주와 부강을 내륙에 있는 취락들을 해안과 하안에 위치한 취락과 서로 연결해주는 결절점(중계기능)으로서 대략에 있는 취락들을 해안과 하안에 위치한 취락과 서로 연결해주는 결절점(중계가능)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금강유역 내의 작은 취락들은 금강수로의 포구와 연결되어 인력과 물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를 소규모 취락들은 금강유역과 그외지역 특히 영동·청주·보은 등을 통하여 낙동강 유역과 대전·옥천·무주를 통해 남부 내륙지방과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시장(場市)또 항시가 재회와 서비스의 교환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실을 하였다. 이때 농촌지역에 사는 농민들은 대부분 5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장시, 즉 정기시를 통하여 시장경제체계에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고정 점토로 구성되는 상성시는 거의 발달되지 않았다. 개항기 이후에도 이러한 정기시에 의한 주민들의 경제활동은 계속 이루어 졌으며, 일제에 의한 강점 이후 식민지 지배체계에 의한 금장유역의 지역구조는 군산과 강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탈 경제 체제로 계속 유지되었다.
본고에서는 군산을 비롯한 우리나라 주요항구가개항되고 철도가 개통되기 시작했던 시기를 전후로 금강유역의 지역구조 변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나. 자연적 배경

금강은 다른 대하천에 비하여 발원지의 해발고도가 높지 않으나 하천의 길이는 길어서 우리나라 주요하천중 가장 경사가 완만한 하천이다.
또한 하살계수도 1.298로서 우리나라 하천중 비교적 낮은 편이고, 총유출량 64.1억 m³로 중 홍수시의 유출량은 57.4%로 전국 평균치(61.2%)에 비하여 낮은 편이므로 상대적으로 홍수발생 가능성은 낮다.
금강은 총연장 401km로 전북 장수군 소백산맥 서쪽 기슭에서 발원, 충북 영동, 옥천을 거쳐 대전과 강경에서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비인만으로 빠져 나간다.
전체 유역면적은 9,886km²에 이르며 유역의 비옥한 곡창인 논산. 강경 평야의 젖줄 구실을 했으며 아울러 예로부터 서해의 내륙을 잇는 물길로서 연안에 공주, 부여, 강경 같은 고도와 하항을 형성시킨 기반을 이룬다.

1) 하천지형

금강은 한국 중남부를 관류하는 대하천이다. 북으로는 습곡산맥인 차령산맥에 의해 삽교천, 안성천 및 남한강과 남으로는 노령산맥에 의해 섬진강 수계와 각각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양대산맥에 의해 구분되는 대지형구 안에서 동쪽은 음성부근에서 남한강의 달천수계와 남서는 만경강 수계와 각각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만경강 유역과는 침식된 준평원 지형으로 이어져 있어 일찍히 호남 일원의 백제문화권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된 적도 있다.
금강 유역은 현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청주시와 6개군,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9개군, 행정수도 세종시, 전라북도 군산시와 6개군, 경상북도 상주시의 세부 일부를 포함한다. 유역의 하천망을 중심으로 지형을 개관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류 구간은 지형의 융기로 인하여 감입사행이 심하다. 장수군 수분리에서 시작하여 장계천, 주정천, 무주천, 남대천을 합한 다음 봉황천이 집수되는 금산분지에 이른다.
금산, 무주, 장수분지는 화강암 침식 지형이며 수지상 침수 지점에 금산, 무주, 장수, 장계 등 산간 취락을 발달시켰으며, 금산지역을 지나 감입곡류는 더 심해지고, 유로는 북류에서 북서류로 변하고 지류엔 보청천에 의한 보은분지, 그리고 옥천분지 등이 발달되어 있다.
다음 갑천 합류부에서는 대전천, 유등천, 유성천 등으로 이루어지는 대전분지가 발달되어 있고 경부, 호남 양 철도의 분기점을 이루어 삼남의 중심도시로서 발달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루고 있다.
이어 부강의 대곡류점을 지나 합강리에서는 대 지류인 미호강과 합류되면서 본류유역의 저지 지형과 연결된다.
미호천은 본류 중류부와 연결되는 구조선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유역은 화강암이 심층 풍화된 저평한 지역으로 되어있다. 서쪽은 수신, 성남등 천안지구와 북쪽은 진천분지의 수계를 모아 남류하며 조치원에서 청주, 진천까지 이어지는 대 곡창이 전개되어 있다.
본류부는 부강, 공주, 부여, 강경을 연결하여 이루는 탁상 단면형과 같은 무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북동에서 남서로 달리고 있는 대구로선을 따른 협곡으로 한때는 수심이 깊었었다.
특히 용수천, 대유천, 마곡천, 안심천, 은신천 등 크고 작은 지류들이 합류하고 있다.
이어 남북계 구조곡간의 정안천이 합류되는 부분의 곡저평야와 대안의 공주분지가 각각 발달되어 있어 지역 농산물 생산의 중심지역을 이루고 있다.
부여의 대곡류부를 지나 강경까지는 금천유역에 구룡평야 논산천, 석성천이 집수되는 곳에 강경, 논산평야 등 범람원이 널리 발달되어 있다,
하안의 배후 저습지의 지형은 일본의 한국 강점이후 하천공사로 인하여 유역의 중심을 이루어 온 곳이며 강경과 논산 등의 중심 취락을 발달케 했다.
특히, 용수천, 대유천, 마곡천, 안심천, 은산천 등 크고 적은 지류들이 합류하고 있다. 이에 남북계 구조곡간의 정안천이 합류하는 부분의 곡저 평야와 대안의 공주분지가 발달되어 있어 지역농산물 생산의 중심지역을 이루고 있다.
부여의 대 곡류부를 지나 강경까지는 금 천유역의 구룡평야 논산천 석성천이 집수되는 곳이 강경 논산평야등 범람원이 널리 발달되어 있다. 하안의 배후 저습지의 지형은 일본의 한국 강점이후 하천공사로 인하여 유역의 중심을 이루어 온 곳이며 강경과 논산 등의 중심 취락을 발달케 했다.

2)금강유역의 기후

금강유역은 충청과 호남지방의 중간에 위치한데다가 해안지방, 충북 내륙지방과 전북 고원지대에 까지 걸쳐있어 해안, 산악, 구릉, 평지, 분지 지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기후의 편재성이 뚜렷하다.
연평균 기온은 하류부 군산이 18.4℃로 지역내 가장 높으며 공주11℃ 대전이 10.9℃, 영동이 10.8℃로 위도의 남북성 외에도 해안과 내륙지방간의 지역차를 볼 수 있다.
가장 추운 1월의 경우 겨울철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저온현상이 나타나 군산 0℃, 공주 2℃, 대전 3.7℃로 연평균과 같이 내륙지방으로 갈수록 낮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수운 이용은 계절성 관계가 깊은 하천 결빙 기간은 12월 하순에서 2월 상순 까지로 되어 있다.
가장 더운달은 대표적으로 충청북도 인 경우 평균 24℃~26℃로 지역작 차이 없이 고온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유출량은 강수량과 직접영향을 미치므로 강우량은 하구부인 군산에서는 1,100mm 내외인데 공주는 1,300mm이다. 이 유역의 연간 강수량의 60%~70%는 6~8월 3개월간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이것은 대부분 하천을 통해 서해로 유출되며, 그 중 70%이상이 단기간에 유출되므로 재해의 요인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유역에 범람원 지형을 발달하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잦은 하도의 변경으로 인해 하안 취락의 입지나 그 구조상 변동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풍향을 보면 하구부 군산부근은 연중 서풍이 탁월하게 나타나며, 계절적으로 보면 춘계에는 북서풍, 하계에는 남서풍, 추계에는 서풍, 동계에는 북풍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통계를 제외하고 서풍계통의 탁월한 것은 하류부 군산 강경 범선의 역상시간을 모게 단축시켜 주며, 조수간만의 차가 큰 것과 아울러 수문 이용상 유리한 입지 인자임을 말해 준다.
중류부 부여-공주간은 지형 기복이 심한데다 구조곡으로 이어져 있어 남서에서 북동방향의 저기압 통로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서해안 조수간만의 영향은 규암까지 미치는데 입조시에서는 선박운항상 이용도가 높지만 퇴조시 하류부는 급류 현상을 이룬다.
위와 같이 기후, 지형, 조수등 자연조건을 종합해 볼 때 한강, 낙동강 수계에 비하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전근대의 금강의 수윤상권은 이들 다른 하천수계의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 인문학적 배경

1) 하향 취락의 입지

교통이란 사람과 물자를 어떤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통의 발생동기나 목적은 다양하여 인간 생활의 기초를 이루며 이를 매개로 하여 비로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도 과언은 아니다.
그중 하천내륙 수로가 존재하는 경우 철도망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는 저개발지역이나 Netherland 북부독일과 같이 상업이 고도로 발달되고 인구밀도가 높은 저지에서는 중요한 몫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도로나 철도가 발달되기 이전까지 지역간 물자수송은 이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하천과 육로를 비교할때 수송망 체계에서는 하천이 육조수송보다 지연적 제약을 더 크게 받고 있으나, 수송기종이나 운송비 엔자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면 에서 금강은 그 유역에 평야를 포용하여 그 효용도가 높았었다. 그러나 여름철 집중강수 현상이나 이에따른 가족적인 하저퇴적이라는 자연적인 요인외에 경부, 호남철도가 개통되면서 교통망체계상 큰 변동을 가져와 수운은 오래전 그 기능을 잃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색을 배경으로 내륙 수로교통이 활발할 당시 금강유역에 발달한 하항취락의 입지 조건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첫째 금강은 그 유역의 경젱적 배경이 내륙수로의 교통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건이 였다. 논산평야와 미호평야 등 유역의 곡창지대와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금강수로는 절대적이었다.
둘째 옛날에는 금강의 수심이 깊었을 뿐더러 수량도 풍부하여 크고 적은 범선이 자유로이 항행할 수 있었으며 그 한계는 유속의 변경점은 부강리까지 였다.
셋째, 가항권 내에서는 대체로 부강은 내륙의 산악지대와 평야지대로의 점이 지대에 위치하여 이를 양지대의 물자교역상의 중계지가 될 수 있었다.
넷째, 해안지방에서 대륙의 영서지방까지 물자의 수송공급에 있어, 낙동강이나 금강수계보다도 금강을 이용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가장 유리했다.
다섯째, 그 외에 평야지대의 풍부한 인력자원은 시장의 인력이나 상품의 운송판매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부강은 금강유역의 내륙수로 종점의 입지조건상 고대부터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이어주는 범선왕래가 많았으며 일찍부터 전국의 8대포구의 하나로 알려졌던 곳이다. 시장위치가 크게 변했던 1900년경까지 하항의 번창기로서 부강은 경제 및 내륙교통 수로의 중심지 였다.

2) 금강 수로의 특성

금강은 한반도의 중남부를 서류하는 대하천으로서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의 삼도외에 경상북도 일부에 걸쳐있다. 이를 크게 나누면 전라북도 장수에서 발원하는 본류수계와 충청북도 음성에서 발원하는 미호강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향은 본류는 처음 북 또는 북서류하다가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부강부근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여기로 부터는 공주, 부여, 강경과, 임천등 지역에 ㄱ,ㄴ형으로 곡류하다가 비인만으로 유입한다. 내륙수로의 이용구간인 부강 이하의 하천바닥 형태는 극히 완만한 상태를 이루고 있다. 대 지류인 미호강은 합강리에서 합류되고 이어서 갑천, 정인천, 유구천, 은산천, 금천 등 여러지류가 합류한다. 그 밖에 많은 격자형 지류들이 합류하는 곳에 대-소규모의 범람원들이 발달되어 지역 농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하안에는 대소하안 취락을 발달시켜 왔다. 중류부근 하천바닥 형태는 미호강이 합류되는 부강-나성구간은 평탄하나, 여기에서 하류로 가면서 점차 원만한 굴곡을 이루고 있다. 강경천 논산천이 본류와 합류되는 곳은 큰 곡류를 이루고 하구까지는 대체로 직선상유로를 나타내고 암초등 연안의 장애물이 적은편이며 평탄한 형태로 되어 있다. 하폭은 강경 392m, 하구부 1,750개 정도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하류 유역은 전형적인 준평원 지형인데다. 하계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강우와 서해안 조수간만의 차가 겹치면 침수피해가 잦은 곳이다. 유역에 발달된 강경, 논산 임천, 서천, 익산, 옥구 등 충적지는 전국 최대의 곡창으로 꼽고 있으며, 수운을 통한 미곡의 대일수혈의 절정을 이루던 곳이다. 한편 조수간만의 차는 부여부근의 규암까지 마치며 퐁향과 일치될 경우, 역상 주행시간을 모게 단축 시켜준다. 그러나 하구부는 낙조시에 강류가 급하여 소형선 정박에 불편을 주는 일이 많으며 이는 서해안 하천의 공통된 특색인 것이다.

2. 개항기 이전의 지역구조

가. 교통로

1) 소금육로

우리나라 전 근대적인 교통체제는 역원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역제의 성립은 신라 초지왕 9년(487년)에 시작되어 대체로 고려중협에 전국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역의 수가 500여개에 이르렀다. 이는 역원제도가 조선개국 503년 갑오년(1894)에 자연폐지 될 때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 흥지도서를 토대로 충청 및 공주지방의 역원을 살펴보면 종육품인 찰방이 있어 몇개의 구역을 관찰하는 찰방역이 5개 있으며 속역을 포함하여 모두 70개의 역이 있다. 전근대 내륙 경제 교통의 자료로서 소금의 유통현상을 인용하는 것도 적절하다. 당시만해도 수요염의 대부분은 임해지에서 생산된 해염이며 소금은 일수품이여서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떠한 산간벽지도 반입 되었다. 소금의 수송편에는 같은 교통로를 통해 생활 일수품까지도 이동되었으므로 그 지역상호간에 경제유통의 주체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통현상은 하나의 이송권을 형성하는 등 지역 교통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산지 취락 주민들의 주요 염의 구입지를 선택하는데는 수농상편리한곳을 기본조건으로 결정되는데 도로가 미비상태이던 전근대에 있어서는 부강과 같은 역참 종점이나 강경, 공주와 같은 중계하항에서 주로 공급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금강의 소금운송 체계는 제1차 소금생산지로부터 해상수송, 제2차는 수문에 의한 역상, 제3차는 육로로 운송하는 순서였다.
서해안에서 소금생산이 널리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나주염이 위주였으며 여기에서 공급되는 군산을 통과하여 강경 중계 하항에서 일단 양육하게되었던 것이다. 이어 객주들의 손을 통해 입고 되고 지방상인들에게 매각되거나 아니면 소형 범선에 옳겨져 공주나 부강까지 운송되었다.
그러나 상품들의 큰 거래는 대부분 강경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금강 유역에는 여러 개의 수송로가 있었으나 그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가) 옥구 – 진안 – 장수길
나) 강경 – 금산길
다) 금산 – 영동 – 추풍령길
라) 연산 – 옥천길
마) 부강 – 보은길
바) 부강 – 괴산길
사) 규암 – 정산길

2) 수운

내륙 수로 수운은 인공적인 철도나 도로와 달리, 자연상태를 이용하여 해로나 공로와 같이 부처도 고정적이며 그러면서도 지형환경이나 기술 수준에 적응하기 때문에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또한 사회 현상과도 강한 상호관련을 가지며 교통수단이 진보함에 따라 입지의 형태도 바뀌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적 교통에 있어 내륙 수로 하천은 운송비율에 있어 타 수단과 비교하면 미곡 수송에 있어 인력 1석, 우마배 2석인데 대하여 수로는 소형 범선일지라도 20~60석 정도라 운송비 계산은 우전구에 의하면 택임 : 하선임 : 해선임은 각각 22 : 5 : 1의 비율인데 육로에 비하면 저렴하다.
내륙 수로는 운하건설이 곤란하기 때문에 화물수송은 자연 수로에만 의존할 뿐이 였다.
그러나 차량산맥이 동에 치우쳐 있는데다 금강은 내륙지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서 그 이용도가 매우 높았다.
금강유역의 수로 이용에 대하여 구간별로 부강이상, 강경-부강, 군산-강경으로 나누며 상류, 중류, 하류로 나눌 수 있다.
상류부는 본류와 미호강으로 나누어지는데 본류부는 한때는 신탄진, 회덕을 거쳐 옥천까지, 미호강은 오근장까지 각각 하선이 출입하던 수로다.
그러나 옥천의 경우 하천종단형이 말해 주듯이 비교적 경사가 심한 편이라서 난항 코스인데다 토사유출로 수로는 마비되어 있으며 인근의 시장선 출입만이 있었을 뿐이다. 미호강의 오근장의 경우도 계절적 유수량의 가감과 유로의 토사 퇴적으로 인하여 1900년 초기 이미 마비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부강 선착장을 범선의 역할중점으로 보고 그 상류부는 수문 이용상의 배후지로 보는 것이 좋겠다.
부강 역할 종점의 교역 후배지는 괴산, 연기, 회덕, 보은, 옥천, 청주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 각군은 직접적인 수문의 영향이 없는 곳들이다.
부강에 이르면 하천이 통행에 가장자리 하저가 얕아 선박 항행은 보행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군에서 부강에 인접되어 있는 지방은 수로에 의한 것이 편한 화물만이 부강 또는 공주에서 집산하되 여객은 대개 육로를 통하여 가는 것이 더 편리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통상은 강경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두 구간의 수송은 부강, 공주에서 수로에 의하거나 혹은 직접 수로에 의해 강경까지 나와 하류의 수문과 연결케 된다.
역항 상품은 국내산 식염, 염건어 등 수산물이 월등하게 많고 기타 군산을 거쳐 들어오는 일용품 등이다.
이에 대하여 내륙지방에서 부강을 거쳐 하류지방으로 가는 상품을 미호강 유역의 곡물류, 엽연초, 생우, 신탄 등 농축산물외에 무명, 마포 등 가내수공업 직물 등이 있다.
중류부에서도 부강 공주간은 수심이 얕은데다 하폭도 좁은 편이어서 하천규모는 길이 8척의 천저형에 40-50석 적재 정도 였으며, 그중 강경-부여간은 70석 까지도 가능했다. 유속은 완만하므로 주행시간은 부강-하류간은 하항 1-2일, 역항 3-4일 정도 였다. 그러나 수량이나 하상조건 및 풍속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난다.(군산철도회1910) 이를 각군에서 곡물류, 엽연초, 들깨, 생무 등 농축산물은 하향으로 보내지며 역항 상품으로는 강경 중계 하항에서 오는 소금, 건어물, 외에 생활필수품 등이 많았다.
역항 상품은 공주를 중심으로 한 상권 내의 각 시장에 대한 공급이 위주로 되어 있다.
하류부 군산-강경 간은 하폭이 모여 곳곳에 천주가 나타나 있지만 조고평균 3m, 수심 5~7m 정도로 입조시에 역항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한강 하류에 비하여 작을지 모르나 하선 규모는 400-500석 적재 정도이며 암초등 장애물이 적은데다 하도의 변경이 적은 편이어서 수로의 안전성을 유지할 수 있어 종합적으로 볼 때 서해안 하천중에는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안이 은진, 인천, 한산, 석천, 여산, 용암, 함멸, 임치, 옥구 각군을 위시하여 진잠, 연산, 노성, 전주, 무주, 금산, 용담, 논산, 고산, 익산 등은 모두 하류부 수문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중 전주, 한산 등은 여객과 화물은 군산으로 직송, 기타 강경인근 지방은 중계항은 강경으로 이송되었다. 하항으로는 논산, 강경, 황산(여산군), 웅포(함렬) 및 군산 외에 성당, 입포등 수계소가 있는데 강경은 중하류부의 중심을 이루며 수륙간 교통상 요지에 해당됨으로써 화물의 집산적 기능은 매우 컸던 것이다. 중계항으로서 상업적 번영을 이루던 1910년 당시 강경시장의 1일간 출시상품은 대단하였다.

3)철도교통

정치, 경제적 중심 기능은 1900년대 초에 철도교통로 개통에 따라 큰 변혁을 가져왔다. 1899년 군산개항에 따라 금강 수운은 하류와 중상류의 하항간 결항에 있어서 동맥의 구실은 해 왔지만 일본의 대륙진출책에 의한 경부 철도가 부설되면서 수운기능은 이미 흡수당했으며, 이에따라 지역 기능에 큰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처음경부철도는 서울서 수원-오산-공주-연산-금산-영동-김천으로 이어갈 계획이었으며 공주에는 연선에서도 가장 큰 역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공사진행중 노일전쟁(1904-1905)이 발발하자 전 세계가 급박하게된 일제는 남은 기간을 단축시킨다는 이유로 난공사구간은 공주-연산-금산간을 수정하여 현 천안-조치원-대전 경유노선으로 완공하게 되었다. 철도가 개통되면서 하류부 중계하항인 강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상권신장에 대해 일대 타격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연산, 청주, 공주는 강경역이 개통되면서 하류부 수운에 의해 군산, 강경에서 소장해오던 상품은 철도수송으로 바뀌고, 특히 공주는 경부철도부지에서 수운으로 소정리에서 육로로 각각 상품을 반입하는 경로를 밟게되었다.

나. 수운상권

1)금강조운

금강수운과 연계된 주요 하항중에서 가장 활발한 항구로는 군산을 들 수 있다. 금강하구에 자리잡은 군산은 고려시대에 이미 인근의 진성포에서 나라의 세곡을 수집하여 조운하던 기점이었다.
조운이랑 전국의 세곡을 일정한 장소에서 수납했다가 범선으로 실어서 수로로 운반해가던 것을 말한다. 고려때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채로 군, 현에서 개별적으로 부근의 포에 집적시켜다가 조운선으로 운반해 갔다. 관·역·강과 아울러 군,현의 하부 행정기구였던 포는 세곡수송의 거점이 되어왔으며, 그 실제 권한은 지방호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가 세곡조운은 고려시대 중기까지 크게 활기를 띠다가 후기에 들어가서는 변동을 가져온다. 즉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하구부 진성창은 해안지대에 인접해있으므로 약탈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조창은 내륙지방으로 옮겨갔다. 고려말기 무신 집권과 몽고족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토지제도가 문란해져 토지와 농민의 수가 감소되어 조곡수입은 급감하게 된다. 그후 금강의 유로변경이나 왜구의 침략등에 대비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창을 여러 차례 이동해갔다. 대동법이 국가적으로 시행되면서 조운을 위한 군산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근대개항이래 일제가 한반도에서 얻은 특권으로 금강, 만경강, 동진강 유역의 광활한 곡창을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토지개발에의 투자와 수리시설 확충등 금강 유역을 그들의 식량공급 기지로 삼는데 혈안이 되었다.

2)하구의 선운

17세기 초기에는 금강하류 지역의 범람원 상의 배우지 습지가 이용되어 그만치 곡물생산이나 수포미의 규모도 컸을때이다. 또한 조곡문제는 사회의 변천속에서 금강 유역을 곡물생산직역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세곡은 함열 현감이 주관하고 군산참과 군산포 검절제사의 권한으로 통제하도록 하였다. 군산청 설치와 함께 수군포영으로서 위치는 금강과 인접한 만경강, 동진강 유역은 물론 전라도 북부지역의 군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효종8년(1657)호남 연도에 실시된 대동법은 금강하구에 있는 군산포의 곡물집산 기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업의 발달, 수공업 성장, 도시의 발달, 화폐의 유통, 차륜의 통행 시민사회경제 체계의 향상 등이 나타나던 시대였다. 이런 환경속에서 군산포는 세곡의 수납과 조운은 물론 민간교역 기능까지도 크게 평가를 얻고 있었다.
금강유역 중류의 강경은 중계하향으로서 전국적 시장의 하나로 성장해있었고, 지역간 교역에서는 중추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였다. 군산포 부근시는 3개의 시장이 있었다. 그 중 정포는 앞서 발달해 오던 경장시장을 이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위치는 현재의 군산선과 경포권이 교차되는 지점이 였던 것으로 금강본류와 합하는 지점이 서로 인접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성창과 경장시장은 상호관계를 이루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만경강이 금강과 합강되어 있었을 경우 본 시장은 남측의 동진강까지도 넣어 삼강유역의 교역을 맡아온 결절점이 였을 것이다. (소송열차, 1903)
16세기에는 곡물유통의 주역을 맡아온 선운업자들의 활동이컸다. 무역상들은 세곡이나 민간 수입곡물 교역을 하는 역할로 크게 부각되어 그들이 모인곳은 수륙이 접하는 장시였으며 금강유역에서는 은진, 강경, 옥주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상품화된 곡물은 거의 지주로부터 나오던것인데 삼각의 지리적 조건을 생각할 때 강경시장의 상거래는 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장시본시장의 권역은 옥구군의 대부분과 군산포, 서천 외에도 강경, 전주, 태안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 후 군산개항, 군산, 시장개설 등이 있는 후는 자동적으로 이에 흡수 당하였다.

3) 번창기 상권

상류부 부강의 하항을 근거지로 해서 거래되던 상품은 해안지방에서 내륙지방으로 행하던 것으로 소금, 명태, 대구, 청어, 새우젓 등의 수산물이 많았고 내륙지방에서 해안지방으로 하행하던 상품은 무명 삼베 같은 재래의료 소, 말과 같은 중계교역하던 기능이 위주였다. 이들상품은 번성기 적재하고 2-5일간에 부강까지 소항이 가능했으며 번성기의 정기 사장일기는 하항에 200척의 범선이 출입하던 일까지 있었다.
상품이 부강하항에 양류되어 내륙지방으로 공급판매되기 까지는 대부분 인력에 의하여 1일 도보권 까지를 1구간으로 해서 전달되어 내륙의 오지까지 수송공급 되었다. 당시 상품공급의 공급경로를 보면 다음 셋으로 볼 수 있다.

  1. 청주경유-진천-증평-음성 방면
  2. 문의회덕경유 보은-옥천 경유 방면
  3. 문의 경유 청산-괴산 방면

여기서 ①은 진천부근에서 아산만의 공급원과 ②는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 수계의 공급원과 서로 접촉 되었으며, 상품에 따라서는 충주, 영월, 원주, 평장 등의 남한강 수계나 문경, 상주 등의 낙동강수계 까지를 진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상품의 범위는 충주시, 중원군, 단양군, 제천군 등을 제외한 충청북도와 전의 이남의 연기군, 구 대덕군 등 충청남도 의 동부를 포함한 지역이라고 본다.
중계 하항인 강경을 중심으로 상품의 태종을 이루던 것은 미곡인데 그 접합 범위는 은진을 비롯한 충청의 9개군과 북부 전라도의 2개군에 걸쳐 있다. 수입물은 정기 사장 출품중 국별로 나누어 보면

  1. 일본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주류, 의류, 기타 일용품으로 도기는 문가에서 직수입하고 기타는 신호에서 인천, 군산을 통해 강경에 까지 입항하던 것들이다.
  2. 청국산 임도, 시포, 망, 잡화 등 인데 상해에서 인천, 군산을 거쳐 들어오는 청국산 상품으로 되어 있다.
  3. 한국산, 소금 및 각종 수산물, 마조 등 인데 그 중 소금은 30곳의 객주점에서 취급하던 것으로 1년 거래액은 1900년대 초 6-9만원을 기록하고 있다. 그 공급범위는 전라도의 구 황산, 용인의 2군, 충청의 임천, 정안, 부여, 석성 등이고 역항 상품이나 각 지방 행상인의 소금길을 통한 수농 판매에 대해서는 전술과 같다.

다. 구한말 취락의 공간구조

1) 가로망 구조

우리나라의 읍성취락은 군현제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말단 자치 단위의 중심 취락으로서 주변지역에 대한 행정적 통계와 군사적 방어 기능을 보갑적으로 담당하여 나갔으므로 근세사회의 사외의 생활중심권에 집중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는 擇理誌(택리지)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당시의 거주조건으로 地理, 生利, 人心, 由本 등의 네가지 조건중 生利기에 해당하는 2대조건으로서 비옥한 토지와 교통이 편리한 지점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교통과 운수에 있어서 교통수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참과 조운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전국에 걸쳐 육운계통을 형성하는 도로망이 역참이며 수로를 이용한 조운이 역참보다 운수수단으로서의 기능이 더 컸다. 따라서 역참은 육로에 의한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경제상의 산업적 기능보다는 군사행정상의 기능이 더욱 컸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조운과 육운이 고려시대의 제도를 수용하였으며 수도가 재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짐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때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금강 중류에 위치한 수륙교통의 요지로서 부여는 읍성 취락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두루 갖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정 및 군사적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특이한 경관구조가 나타나게 되어 통치·군사·교육·종교의 목적에 필요한 관가가 집중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가로망 계획을 볼 때 중심 관가로는 현재 박물관과 부여여고 앞을 통과하는 8개정도의 도시 가로망 도로로서 부여초등학교 앞의 부근에서 공주와 석성을 향하여 분기되고, 서쪽으로는 규암나무를 통하여 임천, 홍산으로 발달해 있었다.
이외에도 백제시대의 朱路 大路로 여겨지는 박물관 양조장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향교 앞을 지나 부여여고를 통과하여 古省에 이르는 가로가 있었으며 또한 浮山의 남쪽에 있던 백강나무쪽으로도 구도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북쪽으로는 공주 가로에서 분기되어 정산에 이르는 육로가 있었다.
이상의 각 역을 잇는 도로는 육로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발달된 대로, 중로, 소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부여군에 있는 도로는 대로는 없고 다만 소로로서 중로에 이어지게 되었다.

2)취락의 성장

군산이 1899년에 개항장이된 이후에 금강유역에 대한 일본인들의 진출이 그 이전보다 더 활발해졌다 금강유역에 진출한 지주·상인·관리·기업인·수공업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농민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를 지주·상인·관리·기업인·수공업자들은 도시에 거주하되 자신들의 거주지 안에서는 조선인의 거주를 최대한 제한하였으며 농민들의 경우에는 조선인이 별로 거주하지 않은 해안의 평지나 하안의 저습지와같은 개척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금강 유역의 일본인들은 대만과 유사하게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현지인들과 격리되어 거주지를 형성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금강유역에서는 해안과 하안에 연적판 저지대의 농촌과 도시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는 일본인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1904년 경부선철도가 개통하기 이전에 진행된 일본인들의 유입은 주로 하천의 수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개항상인 군산의 조계지를 일차적인 교두보로 확보한 일본인들은 하천연변의 하항이나 도진 취락을 2차적인 교두보로 삼아 금강의 상류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표부의 도전에 거점을 둔 일본인들은 대부분 지주와 상인들로써 금강유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매점매석하여 일본으로 추출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인들이 금강유역에대한 경제적 진출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본에 비해 쌀값이 훨씬 쌌기 때문이다. 특히 금강유역 저지대에 없는 논값은 매우 저렴하여 일본평균값의 1/10~1/30정도였다고 한다. (전북농민회 1928)

3)중심지

교통현상과 사회자연현상과는 불과분의 관계가 있다 특히 교통로는 지역의 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근대 금강 수운과 소금길이 체계화 되어 결절 지역에는 대소하항 취락이 발달하였으며, 그것이 사회발전에 따라 여러가지 변모를 가져와 하나의 중심권을 형성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교통이 취락의 입지나 규모 결정의 교인을 위해서 다음의 보기를 살펴본다.가) 부강
일제기 금강수운 종점 취락으로 발달한 이곳은 입지의 중요인자는 금강과 충청북도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중계지점이란테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금강의 지형적인 조건은 미호강과 합하는 합강리 상류에 있으며 지형 단면곡선이 말해주듯이 중류 상류부간수운 경사 변환점에 있어 역창의 한계점이 됨을 입증해 준다. 하항 취락배후지는 남한강 수계인 충주, 단양을 제외한 대륙지방이며 그중 옥산, 청주, 조치원을 연결하는데 곡창지대를 갖고 있어 지역 농산물의 집산의 규모를 클뿐만 아니라 주안이나 태안염이전에 나주 염에만 의조하던 당시 남부 내륙 지방에서는 최대의 소금공급지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배후지를 가지고 있던 부강은 전국적인 시장의 하나로 되어 있었으며 1908년 출시인원 6,000~7,000을 헤아리게 하였다. 여름철 최소의 경우도 2,000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항 최성기 취락은 곡류부 북부공격 사면기 하안을 따라 열촌형태로 나타나 있고, 철도계통전까지는 시장 취락으로 유지해 온 것이다. 이들 하항 취락 전성기는 경무철도 계통전까지지의 일이며 개통 후에도 열본세에 의해 수륙간 교역의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었으나 호남철도의 계통을보면서는 철도 의존도가 높아져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나) 공주
공주는 지형상 동서남이 삼면이 산지로 둘러쌓여 있고 북쪽이 금강에 가로 놓여 있는 관계로 육상 교통로의 발달이 쉽지 않다. 러욱기 교통기관의 발달이 부진했던 저항기 이전에는 대량의 화물수송에 주로 배가 이용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의 문명발상지가 큰 강을 끼고 발달 하였듯이 백제도 금강유역에서 그 역사가 명별했다.
공주는 바다의 존수와 직접통하지는 않았지만 수로로 바다와 연결되었으며 충청도의 행전부사로서 특히 1696(광히-병자)년에 문오품의 해운판관과 해운3인을 두어 아산공진회 소속 7읍의 전세를 15척의 조선으로 관리하였다. 공주는 수로의 주요하항으로 그 중심지의 역할을 해 왔다. 근래들어 사법기관으로도 1908년 공주지방제판노는 아산, 천안서산, 청양 등지의 재판소를 관리하고 있다.
1914년 대전, 강경을 더한 6개로 늘어났으며 그중 대전은 옥천 영동 재판소 까지도 관할하게 되어 충청남북도 전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업화 이전에 이렇듯 행정-사법 중심기가 되어 왔으므로 도시는 소비기능이 위주로 되어있었으며 가두에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은 대도시를 방불케 하였다.
초기 도시 상업 기능에 대해서 중요한 것으로는 1900년대 초까지 있었던 공주 약령시를 들 수 있다. 이는 한의들이 연간 소비하던 각종 한약재 외에도 일반상품까지도 거래하던 계절적인 대시장으로서 외국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약령시가 성립될 수 있던 요인으로는 첫째, 한국에는 약재생산이 많다는 점 둘째, 고대 한방의의 의술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점 들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는 양반 유생들이 의학을 배우며 가정에서 의료용으로 약 또는 강장재로 복용해 왔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다.
충청관찰부 소재지였던 공주는 위의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 전국을 대표할만한 곳으로 이름이 있었다.
전근대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상권을 갖고 발달하여 그 역사는 1750년까지 소급될 수 있었다.
취락은 좁은 곡간에 밀집해 있다. 제민천이 북류하고 이에 평행하는 몇 개의 도로와 교차되는 동서간의 가로로 얽혀 있는 형태이며 이미 1910년대에는 어느정도 현도시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백제시대 하항은 현 곰나루로 전해오고 있는데 그 후 산성 계선장을 관문으로 삼고 있으며 이와 구관아 소재지인 반죽동과는 상설 상가가 설치되어 전근대 정치 중심지로서 전형적인 경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충청관찰부 소속 구제 32개군을 관찰하고 있던 정치수부로서 도시는 소비 인구를 대산으로 하는 상업 기능이 위주였다.
한약을 비롯하여 백화까지도 출시하게 되던바 전국행상인과 수요자가 집행하여 성시를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인구 5,00명중 태반을 각 처에서 집합한 성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부포분류별로 상성 점포만도 60여호, 잡화상 100호, 약종상 32호로 나타나 있다. (공주군지 1957), 그런데 1916년에는 상업은 외국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인 점포가 12개이고 나머지는 청국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노일전쟁(1904~1905) 이후로는 청국인들이 물러가고 일본인들에게 상권이 돌아가게 되었다. 취락은 남북한 복잡한 조건으로 공주분지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북방에 금강이 八字形으로 곡류하고 있어 서해와 내륙지방을 연결해주는 동맥의 구실을 하고 남북간 호남대로가 이에 교차되고있어 호남과 충청지방간 수륙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은 지역에 북의 차령산맥과 공주분지와 금강의 방어적 요세를 이루는 전근대 도시발달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충청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다) 강 경
논산에서 서쪽으로 9.4km 떨어진 강경은 일찍부터 금강하류의 발달된 수운의 중심지로써 북쪽은 평양, 남쪽의 대구와 함께 조선의 3개 시장으로 손꼽히던 상업도시였다.
논산보다 7년이나 앞선 1931년 4월 1일 읍으로 승격되어 강경이 물류의 집산지가 되었다.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군상항에 입하된 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전국적으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부여·공주는 물론 청주·전주까지도 어염을 구하기 위해 강경항으로 몰려들어 전성기의 상권은 충청남북도, 전라북도, 경기도남부까지 뻗어나갔다. 교역한 강경의 변영은 논산평야의 젖줄기이기도한 금강이었다. 세도나루에서 물길따라 내려가면 하류의 장항·군산의 이루고 상류 24km지점에 부여가 있다. 이같은 주운의 발달과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를 배경으로 강경은 물화의 집산지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1899년(광무3년) 군산이 부산·원산·재물포·경홍·진남포에 이어 일곱번째로 개항하기 전까지는 강경이 금강연안 최대의 문호였다. 강경과 금산의 지리적 관계는 마치 서울과 인천·평양과 남포의 그것과 비슷하다. 경부선·호남선 개통 전의 전주-서울간 교역은 육로로 강경까지 간 다음 강경에서 군산까지 금강의 백기를 이용하고 군산에서 서해를 거쳐 재물포로 올라갔다.
조선말 본 지역은 서울과 호남간 봉화의 중계지로 되어 있었으며 교통의 요지로 되어오던 곳이다. 강경은 금강의 지류하천이 합류하는 곳에 었었던 요지 였으며 수출간 중계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금강 분류의 지류인 강경천, 논산천이 합류되는 곳에 충적배후지로 자리잡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원래는 이곳이 저습지 였으며 1600년대에 점차 미곡을 생산하는 옥토로 바뀌게 되었다. 강경 상시장에 이어 1870년에는 하시장이 개시 되었으며, 넓은 곡창을 배후지로 삼는 지역 중심의 상업 취락으로 원산,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의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다.
강경이 농상기능 위주민 시장 취락으로 발달하게 된 주 요인은 지역간의 공간적 통합이다. 즉, 하류부 군산과 중류부 공주와는 수륙 양면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남쪽의 전주와 동쪽의 대전과도 육로로 결합되어 있어서 충정, 전라 양도의 수부와 유역의 곡창을 장악하고 있으며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물산을 일점에 결합시켜주고 있다. 이들 지역간을 더욱 긴밀하고 신속하게 결합시켜 주는 것은 통신망의 구성이다.
1905년 한국과 일본의 각 우체국이 설치된 후 1908-1910년에는 전화 가설을 설치하여 논산, 공주, 연산, 금산, 옥천, 보은, 전주, 용담, 진안, 남원과 시외통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1910년 상·하 시장 각 1시 출신인원은 평균 7,000원 인데 중추절이나 구정전이면 15,000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미 지방 중심지로 은진치노의 내륙부 관문이 였던 시장포는 쇠퇴되고 금강 하구에 잡리장은 강결포 쪽으로 교역의 중심은 전진해 갔다. 이렇게 해서 강경포는 동으로 연산, 노성 북으로 석성, 부여, 입천 등 충청의 구군현은 물론 여산, 함열에 이르기 까지 대곡항을 장악하는 지점이 되었으며 명실공히 지역농장의 중심지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금강수로로 황해안 지역과 내륙지방을 잇는 대동맥이므로 이는 지역간의 수로라기 보다는 삼국시대 이후 중간이나 일본간의 교역 또는 군사상 통로로서 이용되어 오던 곳이다.
강경포가 대 시장으로서 크게 부각하게 된 것은 1870년에 들어와서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미양요(1871)를 위시하여 외세의 침입이 많았으며 내외적으로 매우복잡했던 사회환경 속에 있었다.
1870년 부산, 1874년 원산, 1877년 인천의 순으로 개항하게 되었는데 금강 하구의 군산 부근은 아직도 저습지로 미개발 상태였으며, 게다가 남과 북에 전주와 공주의 2대 수도를 장악하고 있었던 강경포는 내륙무 가항지로 하구부 개항에 앞서 지방이나 국내 상인들은 물론 이미 왜래 상인들의 상행위까지도 이루어 지고 있었다.
甲申政變(1884) 이후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행상범위는 후기의 사방 40리에서 100리로 확대되면서 사실상 정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들은 미개항 항구에서 밀무역 행위는 금강 연안의 경우, 쌀, 대우, 우피 등이 큰 것이었다.
다른 한편 서해안 지구에서는 청국 상선들이 밀 무역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대상자는 충청, 황해, 편안의 각 도 해안이였는데, 1884년 범선 2척에다 洋貨(양화)를 만재하여 은진항 강경포에 나타나 밀 무역 행위를 해오던 것을 예로 해서 무수히 출입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청국 무역선의 경우 인천을 택하는 것 보다는 금강 하구를 택하는 것이 범선이 출입하는데 편리했기 때문에 금강을 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역항 화물로는 양모, 백옥, 은자 등이 있었고, 귀향편에는 하구 부근 유역에서 밀어한 것을 염귀하여 반출해 갔다. 이와같은 내적 외적 사회변동은 단기간이긴 했지만 강경포 시장의 발전을 크게 좌우해 왔다.
전국 여러 개항지는 모두가 관주도형인 투자이였는데 대해, 본 하항만은 민간주도형인 상업지로 발전해 온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1885년에는 일본 관현이 소항, 답사한 사실이 있으며 1887년에는 강경포시장의 이점을 노리는 行商者(행상자)가 처음으로 발을 들이고 모험적 상행위를 해 온 바도 있다. 한때는 부산을 거점으로 행상인들이 거래를 하더니 그 후는 1892-1893에는 인천방면에서 미국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인천에는 1889년경 외국상인중 일본이 가장 많았으며 본국 상품의 판로를 개척과 미곡을 위시한 토지의 매입을 위하여 각지를 순회하던 본거지가 되어왔다.라) 군산
군산은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확하기 위해 개항시켰고 그 때문에 급성장한 도시이다.
금강 들머리에서 서해의 뱃길을 이어주는 군산은 멀리 백제때부터 문물교환의 지점이였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도 도창을 두고 만호진영으로 하여금 조운 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군산은 조선조 3대 시장의 하나인 강경의 문헉으로 일찍이 선상의 왕래가 빈번한 상업항구였다. 보부상이 육로 행상이라면 선상은 수로 행상이었다. 강경장보다 규모가 못하지만 군산에도 개항 전에 이어 4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 깊은 경상시장이 있다.
이 경상시장은 개항 뒤 신시가지에 군산시장이 생기면서 상권을 빼앗기고 1920년 경에는 뇌퇴되서 갔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되었다. 마산, 성진과 함께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은 일곱 번째 개항되었다.
강경, 군산, 옥구지방은 예로부터 유수의 곡창을 끼고 있어 미곡의 도정과 어염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에는 옥구에 국가 공세를 위해 창고가 있었는데 이후에 군산으로 옮겨갔다.
개항 당시 군산은 초가 일색인 촌락에 150호, 700인의 규모였는데 일본인세를 주축으로 입주자는 늘어갔으며 하항도 급속도로 발달하여 갔다. 초창기 한국인 거주자는 북부 하구에 면한 현 군산내항 서부일대였으며 개항 이후는 일본인에게 밀려서 동족의 전라가도까지 이동해갔다. 그 후 한국인들은 전라가도 연도에서 집단을 이루어 취락을 형성한 바 있다. 감리서, 경찰서, 우체사, 전보사 등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밀어내고 북부 하안지구에서 새 시가지를 건설해갔다. 그 중 당초 본정 전주통은 가장 먼저 개발된 것이며 높은 인구 밀도를 나타내고 있었던 지구라서 일본 영사관 본관 해관은 북상으로 돌출한 북정구 일때에 위치하고, 우편국, 병원, 사찰들이 집결되어 있는 등 일본인 관계기관이 한데 모여 있었다.
개항과 동시에 통감부 이사청 본관이 설치되었는데 1906년 이를 이사청으로 승격시켰으며 공주, 전주지청을 관찰하게 한 바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충청, 전라의 사실상 수부로 상대적인 위치가 바뀌었다.
이것은 금강하구 하류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전 유역의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을 말하며 이로서 지역구조상으로 대 개편을 가져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군산항은 농업과 수출입 무역을 하나로 묶은 형이다. 철도개통 이전에는 전 군도로와 수도는 농산물을 집산케 함은 물론 수입 상품을 원심적으로 내륙지방에 분산케 하는 입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대해 해상 항로로는 1910년 현제 군산-인천간, 군산-목포간은 기선으로 신의주, 용암포, 안동, 진남포 등과 그리고 일본 대판, 신호, 하관과는 각각 정기선 항로로 월 2~4회씩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군산의 공간적 접합관계는 대일본 및 대청국 등이 국제적 관계로 점차 변해가고 있음을 뜻한다.
개항 이후 1899~1907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무역구조는 수출초과로 나타나 있다. 그 중 대부분이 미곡인데 출곡기에는 입항되는 양곡이 부두를 채울정도였으며 그 수량만도 1906년 15,000~20,000석을 나타낸 바 있다.

3. 개항기 이후의 지역구조

○ 행정구역의 개편
일제는 건양원년(1896년)에 개편된 13도제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도 이하의 행정구역은 통폐합하여 크게 개편하였다. 도 이하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주요 원칙으로 작용하였다. 군현은 2개내지 5개씩 통폐합하여 한 개의 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는 단위 행정구역의 면적이 확대되었음과 아울러 군과 현이라는 두가지 행정명칭이 군이라는 것 하나로 통일된 것을 의미한다. 면의 명칭구역도 또한 종래의 2개내지 5개가 하나로 통합됨으로서 그 면적이 늘어났다. 일제가 이렇게 행정구역을 개편한 이유는 군과 현의 인구규모와 단위면적을 표준화함으로써 세금징수와 식민통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에 있었다.(염인호1983)
행정구역의 식민지개편이 일어난 결과 금강유역에서는 15개 군현이 6개의 군으로 흡수되었고 903개의 면이 204개의 면으로 통합되었다.
행정구역의 통폐합과정에서 행정중심지위를 상실한 종래의 군, 현, 면의 소재지 중에서도 특히 군과 현의 소재지는 대부분 취락의 성장이 정체되거나 쇠퇴하였다. 반면 통합 후의 군,면 소재지는 중심기능이 집중되어 통합전이 볼 수 없던 활기를 띄게 되었다.
○ 군산 개항후
1899년 개항된 군산은 앞서 갑오정혁이 이루어지면서 대동법이 폐지되어 수군방어지로서 군산도진은 종막이 내려졌고 전근대 산업형 도시로서 지역 기능도 종말을 고하였다.
급변하는 사리정세속에서 금강 하류부 군산도는 중계하항 강경을 중심으로 한 금강유역 일원의 상권과 김재평야 등 광활한 곡창지대를 배후지로 삼는 농축산물 수출 및 외래 상품의 집산지로 발전해 갔다.
더 나아가 국내에서는 북쪽의 인천 남쪽의 목포를 비롯한 여러 개항장과 해로를 통해 밀접한 결합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대일무역에서는 오사카를 위시한 일본의 각항과의 관계등 새로운 공간 구조하에 속하게 되었다. 다만 근대 항구로 늦게 출발한 것은 항만의 입지가 자연조건 외에도 배후지역 형성에서 미약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청일전쟁(1884-1896) 이후에는 조선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가 빈번하였다.

가. 교통로

1)근대도로

역원제도가 폐지되고 그에 대신하여 근대적인 교통로인 한국최고의 철도가 1889년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의 32km에 걸쳐 완성되었다. 곧이어 1905년에는 경부선, 경의선 등이 각각 개설되어 교통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는 도보와 하천수로 밖에는 내륙교통 기 수단이 없던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적 교통수단이 도입된 시초로서 교통상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조선말까지는 구대로가 교통로의 근간을 이루었으나 철도개통후 경부선, 경의선 등 철도가 간선교통로로 대체되었다. 이시대와 철길이 좋아하지 않는 주요 도읍과 새로운역 사이에 ‘신작로’라는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이당시의 신작로는 철도의 보조수단으로써 주로 철도 교통로와 연결되어있었다. 그리하여 1904년 영등포 대전간의 경부선 개통후 조치원 공주 간의 넓은 신작로가 1906년에 뚫리게 되었다. 이어 1906년은 공주-논산-강경간에 도로개수사업이 있었으며 1912년 10월에는 대전역까지 2등 도로 개통이 있었다. 1913-1914에는 철도역과 주요읍사이에 노선이 개설되기 시작했는데, 이때에 충남에서는 천안-온양간, 공주-조치원간에 노선이 개설되었다. 공주는 도청소재지 였기에 도로망이 일력부터 방사상으로 발달되어 도로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렇게 발달되어온 신작로 중에서 1920년 까지 공주를 중심으로한 도로는 공주-유성-대전, 공주-논산-부여, 공주-조치원-청주, 공주-예산선 등이 있다. 이중 조치원에서 공주를 연결하여 강경에 이르는 도로는 공주를 중심으로 한 것중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자동차교통은 충남전체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충남혁심지인 공주는 도로교통이 집중하였고 자동차 대수도 가장많은 교통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철도 연선에서 소격된 공주는 점차 근대 교통로상 주변에 남아있다.
1913년까지 충청남도 도로 개발현황은

  1. 옛날기호와 호남간 간선도로였던 경성-수원-공주-강경을 연결하는 1등 도로를 위시하여
  2. 대전-공주간 2등 도로를 겸용하여 진장에 이르는 3등 도로
  3. 공주-강경간
  4. 공주-부여 이르는 3등 도로등이 였는데 그후 1918년 폐지
  5. 공주-조치원-청주-충주
  6. 공주-예산 방향이 개통되어 방사상망 구조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충청남도 중상에 위치한 공주는 방사성 교통망에 주변타지역과는 더욱 긴밀한 관계로 이어져 지방교통망의 중심에 이루는 듯 하였다.
그런데 당초 기대치보다는 달리 공주는 경제적 기능은 도리어 각 철도 연변의 각 역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20년 이후 공주는 청양과 함께 충남 일주 순환 철도의 장벽에 둘러싸인체 주변지역과의 격차는 더 커갔다.

2) 육로와 연안수로

가) 육로
호남철도 군산선은 1906년 기준 계획 단계에 있었으며 수송망 계획상 수운과 결합되지 못했던 배후지는 육로에 의해서 군산포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들면 전주-군산선(120리, 약 30km), 공주-강경-군산선(230리, 약 57.5km), 목포-고부-김제-만경-군산선(390리, 약 97.5km) 등이 있었다. 전주-군산선은 전국 도로의 전신으로 1905년 구 한국정부의 국내주요 지역간의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제 1기로 계획한 노선으로 1909년에는 우마차, 인력거 운행 외에 봇짐, 검, 소등에 의하여 수송되고있었다. 공주-군산선은 금강 우송과는 보완관계였다. 즉 금강에 의한 화물수송이 많으므로 본 노선의 이용률은 임피등 군산과의 1일 도보권 내외 내륙부의 사람과 가축에 의한 수송이 주였다. 목포-군산선은 만경강, 동진강, 고부, 정읍을 거쳐 목포까지 이어지면 노선으로 특히 만경강과 하구를 누벼가는 지름길로 유역의 농수산물 수농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깊으며 수로나 해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적 거리를 택하는 화물은 본 노선으로 보관되어왔다.
나) 연안수로
열강국들이 우리나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1876년 상포가 개항되었다. 그와함계 공물이 밀려들어오고 가항수로가 보다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에 군산이 개항되었고, 이로써 금강의 내륙수로 이용상 근대적 개원이 이륙되었다.
농업적 배후자를 갖고있었고 게다가 남과 북에 전주와 공주의 2대 수운를 당악하고 있었던 강경포는 이러한 좋은 조건속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대구, 평양과 더불어 3대 시장의 하나로서 1903년 경기는 충남 전북은 물론 충북일부의 지역까지 그 배후지로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공주는 행정적으로는 수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강경의 상권에 속했다.
근대항로가 발달하기전 거의 일방적으로 쌀과 콩을 싫어 가지만 하던 교역구조가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인구의 증가와 근대 산업의 발달로 특히 곡물을 위시한 농산물의 매입과 일본 상품의 관로계획에 성공한 일본인 들에 의한 무역이 주도 되었으며 그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910년 수출품으로서는 현미가 대부분이며 미곡 이외의 수출품으로는 대두, 들깨, 밀, 소가죽 등을 들 수 있다. 수입품으로는 일본을 위주로 공급되는 생활필수품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3) 철도교통
경부철도는 삼남지방과 기호지방을 통과하는 대동맥이며, 한일양국간에 채결된 조약에 의하여 1902-1904간에 완성된 철도이다. 이 철도의 개통으로 일본이 얻은 이익은 한반도 보고인 삼남지방을 개방하는 경제적인 것도 컸지만 간접적으로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인 검점확보 및 그 이익이 컸었다. 이 철도가 완공됨으로서 한반도의 남부는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갔다.
이 철도가 개통되면서 금강수운을 이용하여 들어오던 상품은 인천이나 부산등지를 경유하여 철도를 이용하게 되고, 이렇게 됨으로서 금강과 경부철도와는 T자형 구조로 바뀌게 되어 종점 하항 취락인 부강은 1교차점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의 계획이였던 금강 중류부 통과를 소외된 것은 새로운 권역을 형성하게 하였다.
호남선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일본은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유역의 충청남도, 전라남북도의 삼도를 장악하는 등 이 철도는 산업상 중요한 노선이 될 수있었다. 1911년에 대전-강경간의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1912년 강경-이리선과 지선인 이리-군산간의 연장거리의 준공을 걸게 되었는데 이로인하여 금강 남부 수운 상권은 크게 축소 되었다.
정치,경제적 중심기능은 1900년대 초에 철도 교통로 개통에 따라 큰 변혁을 가져왔다.
1899년 군산개항을 전후하여 금강 수운은 하류와 중상류의 하항간 결합에 있어서 동맥구실을 해왔지만 일본의 대륙 진술책에 의한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수운기능은 이미 흡수당했으며 이에따라 지역 기능에 큰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하류부 중계 하항인 강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상권 신장에 대하여 일대 타격이 있었으며 게다가 연산 이북과 청주나 공주는 강경역이 개통됨으로써 하류부 수운에 의해 군산, 강경에서 소장해온 상품은 철도 수송으로 바뀌고 공주는 경부철도 부강에서 수운으로 소정리에서 육로로 각각 상품을 반입하는 경로를 받게 되었다.

나. 상권의 개편

1910년 이전만 해도 충청남도 내 상인들은 부산, 인천, 서울, 군산등지 상인과도 직접적으로 거래해온 것이 대부분이였는데, 육상도로 교차로가 개통되면서는 철도 연선의 상인들이 국내 개항지는 물론 일본이나 기타국가의 무역거래를 하게 되었고 내륙지방 수요지에서는 일단 이들 철도 연선상인들을 거쳐 간접적으로 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미곡 수출만 해도 한때 지주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관계로 소작료 집합량이 컸었으나 교통로 변펀에 따라 하류부 강경, 군산 등 현지 상인들에게 상권이 돌아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공주의 상업은 군내 생산 농축산물을 위주로 하게 되고 기타의 공산품 거래는 점차 철도 연성 각 역 중심의 거래로 바뀌게 된다. 개항지의 객주 지간을 통한 체계가 아니고, 다만 도청을 대상으로 상품을 공급하던 소매상 이외에는 영세 상인들뿐이었다.
서울, 인천 과거 거래가 계속 되었고 대전, 조치원 등지와의 거래관계도 맺고 있었다. 상업기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지만 식산은행 공주지점의 통계를 분석해 보면 식산은행 거래 지역은 충남에서 대전, 연기, 논산, 부여, 천안, 아산 등 6개군이 제외되어 있어 관할 행정구역 13군에 비한다면 크게 축소되어있다. 보령시는 1910년대 전반기까지도 크게 번창해 오다가 철도가 개통되면서 부터는 대구에게는 그 기능을 넘겨주게 되었다.
중.하류간의 강경, 하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상권은 추풍령 이북의 황간, 영동, 옥천 등 충청북도, 진잠, 연산, 노성 등 충청남도, 전주, 무주, 용담, 익산, 고산등 보령산맥 이북의 전라북도 강경부근의 논산, 은진, 석성, 임천, 용안, 여산이 이에 속해 있었고 그 밖의 입도, 성당, 한산 등 하안은 물론 일부 강경집산이거나 아니면 군산직농상권으로 나타나있다.
본구간에서 내륙부는 차령산맥 이남의 정산, 청양, 공주 등의 산간지역의 콩, 들깨, 우피등 농축산물을 하류지방으로 이송하여 강경 중계 하향을 거쳐 군산포로 갔었다.
내륙산간지방 수출상품이 위주였는데 이밖에도 수요의 증대에 따라서 일상생활 필수품 소항입하도 많아 지방시장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부강 집상권에 대하여는 충청북도 내륙지방 생산물이 대부분이였고 강경 중계를 거쳐 강경권 상품과 압류되어 갔다. 개항기 수운을 통하여 거래되었던 상품은 강경 중계항 또는 직결 수운에 의해 공급되었으며 시장의 발달과 선박 근대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수로를 이용하는 군산포와의 결합도는 더욱 높아갔다.

다. 취락구조

1) 식민도시의 성장

경부선이 개통된 후에 일본인들이 경부선 연변에 도시를 새로이 건설하고 이 신흥도시를 대륙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대전, 조치원 등을 바로 이렇게 생겨난 후 성장한 신흥 도시들이다.
한일합방 이후 대량으로 들어온 관리, 사업가, 상인, 소공업자들은 대개 이 신흥도시들이 정착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보다 먼저 들어와 포구와 도전에 살던 일본인들도 이 신흥도시로 이주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제 식민지의 전기간 동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 식민지 도시인 대전 조치원등은 조선인 거주자들이 대부분 차지한 전통도시인 공주 부여 강경등에 비하여 상대적인 도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 신흥도시에서는 일본인들이 수요에 부응하여 제2,3차 산업이 활발하게 성장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서어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제3차 산업의 기능은 일본인들이 집중거주하는 군산, 대전등에 더욱 편중되어 발달하였다.
군산 대전 조치원 등의 신흥 도시들이 부여, 공주 등의 정통 도읍들 보다 훨씬 높다. 총거주자 중에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 도부터 1935년으로 옳아 감에 따라 점차 감소되고 있다.

2) 행정 중추기능 이전

교통로 개발에 따른 지역구조 개편은 근대 도시발전을 뒤지게 하였다.
1914년 당시까지만 해도 각 도청은 각 도 관찰부 소재지를 그대로 지켜 왔는데 이는 통치상의 이유보다는 한국의 민심 동향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변동되면서 이런 소재지는 대부분 행정 집행상 문제점이 많았으므로 점차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전하지 않으면 안될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다른 도와 마찬가지로 공주 역시 근대 이전에는 삼남으로 통하는요충으로 중시되어 오던 곳이지만, 철도교통로에서 이미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교통상 불편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대전은 도시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불리한 면도 있지만 경부, 호남, 장항선철도로 연결된 순환 교통로를 이용하면 부채의 측과도 같이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정치적 기능을 잃은 공주는 도시 부흥책으로는

  1. 교통로의 재개발
  2. 교육도시로 전환
  3. 위생적 도시면모 등의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그 내용은 근대 이전 기호와 호남간의 주육로를 복원하는 한편, 금강 수운을 철도로 대치 할 수 있게 하는 한편 교육문화적인 기능으로서 전환 할 수 있게 하는 시도가 주였다.

3) 중심도시의 성쇠

가)부강
경부교통개통으로 지역구조에 있어 크게 개편을 거쳐온 중 하나가 부강이다.
즉 충청북도 내륙지방의 물량을 집중시키는 한편 금강수문을 통하여 내륙지방으로 어염등을 공급하던 종점의 하항 취락이였는데 철도역이 된 뒤에는 한때 철도와 수운을 연결시켜 주는 분기점에 놓여 철도운송상품은 수운에 의해 하류로 운송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도변천에 따른 지연적 요인과 철도나 도로중심의 교통으로 바뀌면서 수운은 마비되어 1개 역전취락으로 바뀌었다.
1921~1922년 간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부강 중심 소금공급은 충북선이 이를 맡아 수송하게 되었고, 분기점 조치원은 대전과 함께 하항당시 부강의 상권을 이어 받게 되었다.
부강 하항의 번창지는 대체로 1909년까지 였다. 그 후 부터는 쇠퇴기로 접어든다. 그것은 1900년대 초 경부선의 부강역 개통후에는 물화의 수송은 신속한 철도 교통로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과거에 하항에 자리 잡았던 구 시장은 철도 연변인 현 시장위치로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통 초기의 철도의 열차운행은 1일간에 1~2회 왕복 뿐이여서 내륙수로의 하항 기능을 탈취할 만한 영향력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대략 밣혀지고 있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서해안과 내륙지방간의 물화 수송은 호남선이 대행하므로 내륙 수로에 의한 공급물화의 운송량은 격감되었다.
또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영서 내륙지방의 상업로도 철도에 빼앗기게 되어 부강은 과거 내륙과 해안지방과의 물화 교역의 중계지였던 하항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항기능을 상실하게한 또 하나의 요인은 토사의 퇴적관계에서 오는 내륙수로 자체의 마비이다.
이와 같이 금강 내륙수로의 기능 상실에서 발생한 하항 취락의 쇠퇴기로 들면서 부강은 하항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가며 경부간의 철도연변에 자리잡은 시장 취락으로 당분간은 새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23년부터는 취락의 몰락기로 부강의 상권이 축소됨에 따라 도시나 인접지역으로 이주하여 취락 상업지역에 크게 영향을 준 시기이다.
1931~1935년까지의 전국의 인구 증가율은 3.5%, 1936~1940년에 2.4% 비하면 증가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감소된 것을 뜻한다.
상업 및 교통업이 감소하는데는 두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 상업위주의 시장 취락 기능을 상실한 점과 또다른 하나는 일제 말 국민 총동원령에 의한 상업 후 인구가 다수 징용당한데 있다고 본다.
농업 인구가 증가한 것은 취락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상업인구로 전입해온 것으로 영향이 있으며 그 결과로 제한된 토지에서 경작규모는 영세화되고 생활은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나) 공주
철도개통으로 인하여 공주는 도시발전이 상대적으로 정체되기 시작했다.
일제시대의 철도역과 취락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기존의 도시와 신흥도시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홍성, 충주 등 한인들이 중심이된 기존도시는 시가지와 역전이 1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에 대전, 이리 등 일본인이 중심이된 신흥도시는 역전이 시가지 중심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이 반일 감정이 상존하고 있는 기존 도시에서 되도록 한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한인전통의 도시이며 도청 소재지인 공주에서 일본인들이 조성한 신흥 항구도시 군산으로 역시 전통도시이며 도청 소재지인 공주에서 신흥 교통도시 대전으로 도청 및 도의 모든 중심기능이 이동된 것은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주는 일본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으로 근대 교통기관인 철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쇠퇴 과정을 걷게 된다.
근대 교통 기관이 발달전에는 전국대로 중 제6대로의 중요한 통로가 였었던 공주는 관내에 많은 역을 거느린 육상 교통의 중심지이며 금강을 통한 내륙수로의 요지였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공주는 근대 교통로의 본선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후 철도 연변의 도시보다 쇠퇴되어 갔다. 1920년대 장항선의 개통으로 서북부지역의 경제권 마져 빼앗긴 공주는 겨우 행정권의 명맥으로 충남의 중심기능을 유지했으나 교통 경제 인구 등에서 많은 발전과 기능이 강화된 대전으로 1932년 도청이 이전 되면서 행정기능마져 악화되었다. 도청 이전의 대가로 도시의 부흥책이 거론되고 그중의 하나가 교육도시로서의 전환이었다. 기존의 학교에다 공주 농림학교가 다시 세워졌으며, 특히 공주 여자 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국내 학생은 물론 일본, 만주에서까지 입학을 하는 등 교육도시로서의 이름을 잡아갔다. 오늘날 3개 국립대학의 발전도 이에서 기원된다.
공주는 한때 백제의 수도로 조선시대에는 충청권의 정치 경제적 수도로서 크게 번창한 바 있으나 근대 초기 일제의 대륙 진출 정책에 의한 경부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 연선을 중심으로한 경제권이 형성되자 이어서 소외된 나머지 근대 도시발전이 뒤지게 된 것으로 정리 할 수 있다.
1925년 공주 지정면의 인구는 10,035명이었는데 5년 후인 1930년에는 12,254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도청 이전 후인 1932년에는 10,867명으로 격감되었다. 이는 도청 이전으로 인하여 공무원이 대거 이동한 탓이다. 특히 한국인의 경우 상업 인구 외에도 지주나 기타 중산층 인구가 대도시나 기타 지역으로 이동해갔고 일본인은 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과 상업인의 인구이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 강경
군산 개항에 앞서 대회 무역의 터전을 이룩한 바 있는 강경은 철도 개통 후 특이한 추세를 나타냈다. 일차적으로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내륙 수로 중 부강, 공주에서오는 하항상품이나 역상 상품은 철도로 우회 운송 되었기 때문에 우선 경부철도 동부 상권을 잃은 셈이며 2차적으로 호남철도가 개통되면서는 상품 수송상의 지역 구조의 변천도 들지 않을 수 없다. 군산지선이 개통되면서 수운과 철도 양면에서 군산과는 더욱 밀접하게 결합될 수 있어 기존 시장세를 가지고 한동안은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도의 유사로 인하여 출입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감소를 가져오고 수운 이용 기능도 감퇴 일로에 있었으며 게다가 호남선 철도 분기점인 대전의 발전과 하항 군산의 상권 확대로 점차 위축 당하게 된 것이다. 1914년 은진군의 논산 합병이라든가 그 후 동양척산(주)의 대전 이전등은 이러한 추세를 입증해 준다.
라) 군산
호남선도 개통이후 군산항은 그 지선의 종점에 자리잡게 되어 수운교통과 철도교통을 연결해주는 새로운 결정점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역간 경제권에도 대 변화를 가져왔음은 물론 점차 유역의 상권은 수렴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1899년 개항 당시 한국인 여자와 일본인 이주자 20호에 무역액 1,200원에 불과했던 것이 30년 후인 1929년에 전국 우수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호남철도 군산 지선 개통을 본 1912년을 계기로 군산항 상권도 크게 신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철도 개통 당시 승객은 1년간 14만명이었던 것이 1929년에는 55만명으로 화물 발착은 3.6만톤에서 26만톤으로 증가되었다. 그 중 미곡이 2천톤에서 13.5만톤 달하고 있어 역세상으로본 군산의 지위는 전국 228개 철도역중 제7위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군산항은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고 이것이 대 일본 무역항과 철도 수송량 증대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대안의 장항을 종점으로 하는 장앙선 철도의 개통 이후는 충남 내륙 오지에 이르기까지 그 물자를 수렴하게 되고 명실공히 금강 물류의 수출입 기능을 가지고 성장해 갔다.
한편 상권과 관련하여 군산의 행정력의 대상 구역은 전라북도 일원, 옥천, 부강, 영동, 심천, 청주 및 기타 충북선 연선의 수개 역 등 충청북도 일부와 목포,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사거리, 송정리 기타 전라북도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이어 당시 전라남도 일원을 제외하고 크게 확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군산으로 들어오는 외래 행상자의 출신지는 동경, 대판, 명고옥, 경도, 신호, 하관, 횡빈, 고농, 복관, 서울, 부산, 대련, 등으로 그 범위는 이미 금강 유역의 하항 이라기 보다 유역의 상권을 집약하여 국내 및 일본, 만주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할 수 있다.
군산은 일본인의 비율이 급증하여 한국인과의 인구비율이 점점 근접하다가 결국 역전되기 까지 하였다. 군산을 개항하고 수탈의 중심지로 삼은 일본인들은 토지 조사사업과 동양척산(주)를 앞세워 옥구, 김제, 만경, 부안 등 기름진 평야를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부)로 승격할때 군산의 인구는 8,266명 그 무렵부터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고 군산의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일본인 중심의 새거리는 町, 한국인 거리는 洞으로 구분하였다.
1910년 6월 대전을 거점으로 착공되어 1911년 11월 강경까지 개통된 호남선이 그 이듬해 3월에는 강경, 이리, 군산까지 완공되었다. 이리, 김제쪽보다 지선인 군산선이 먼저 완공된 까닭은 물론 미곡의 집단 수탈지로서 군산항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된 탓이었다. 이리하여 전주 서울간 교역은 전주 강경간 육로를 이용하여 재래의 선편으로 금강구를 하행, 제물포로 양륙하던 것이 대전 강경간의 철도를 이용하게 하였고 군산항의 개통으로 강경포의 상권이 군산으로 옮겨졌다.
1930년대로 접어들자 일본 농업의 흉작을 계기로 식민지 한국을 완전히 일제의 식량 공급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군산. 목포. 원산, 인천의 부두는 일본으로 실어갈 쌀가마니가 산을 이루었다.
당시의 인구는 6만명으로 도청 소재지 전주보다는 1만명이 더 많던 군산의 인구는 광복 직전에는 한국인 8만명, 중국인 1,000명, 일본인이 1만8,000명 등 9만9,000명이었다.
마) 대전의 발달
대전은 충북과 충남의 중앙에 위치하고 경부선 철도의 중간적 거리가 있는 데다 호남선 철도와의 분기점에 놓여 있어 한국의 관문인 부산, 군산, 목포의 철도에 결합되어 있어 충청, 전라, 경상의 6도를 장악할 수 있는 공단 관계에 놓여 있다.
도로망은 충청남도를 단위로 볼때 대전을 중심으로한 주변지역과의 교통경제권인 ⓵ 대전-공주 ⓶ 대전-논산-강경-군산 ⓷ 대전-금산의 3개선을 따라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충청권 내지 전국 경제권 형성의 입지적 조건이 유리하여 1904년 러일전쟁 당시부터 일본인들의 이주가 활발하였으며 상업도시로서 크게 발달 되어 갔다. 인구 구조로는 1910년 4,161인 중 일본인은 3,257명으로 되어있고 그후 1924년에 6,724인 이며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 되어 1930년에는 21,679인으로 당시 공주 19,050인 보다도 많게 나타났다.
대전역에 입하된 수송량은 미곡이 대부분인데 발송지는 신탄진, 옥천, 조치원, 논산 등지로 그외 부산, 군산 등이 있어 특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건어물, 염건, 명태, 식염 등 수산물도 과거 하항인 강경이나 군산 외에 부산, 초량 등지에서 기차편으로 발송되어 오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금강 수운을 통해 오던 상품 중 대종을 이루던 것인데, 전남도나 인천 등 생산지에 인접한 지역에서 발송되는 것이 특이하다.

4. 맺는말

필자가 한국수자원 학회지 투고한 원고는 기술적, 공학적 및 과학적인 원고를 대체로 쓰였으며 이를 다소 탈피하려고 제가 책꽂이에 소장하고 있는 논문집, 보고서, 공사보고서 학회지를 주로 소장하고 있다.
팔십 중반을 넘어 이제는 모든 책을 정리하고 비울 시기가 되어 책 하나하나 정리하던 중 제가 54년 살았던 충청도 금강에 손을 대니 이와 같은 제목을 찾게되어 적은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다음의 미숙한 결론을 얻어 보았다.
첫째로, 금강지방은 근대 개항과 철도 개통기를 시점으로 유역의 공간구조의 변천에 대하여 중심과제로 다루었다.
금강은 유역인에게는 유일한 젖줄기였으며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연안 하항을 문호로 삼아 발달되어 왔다.
둘째로, 금강 구조상 수운수로 형태상 기후, 조수, 간만의 현상 등 자연 조건은 광대한 농경조건을 배후지로 갖고 있는 강경과 같은 중계 하항 시장을 발달케 했으며 그 권역은 낙동강, 남한강수계의 일부까지도 포함되고 있다.
셋째로, 군산 개항에 있어서 유역을 장악한 일은 토지, 식량수탈을 위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유역으로 부터 일본과 청국으로 이어지는 무역 대권안에 있으며 유통 문화적 자극은 육로 소금길로 이어져 금강 수운 상권을 크게 발전시켰다.
넷째로, 경부 철도개통은 금강 수운과 철도 수송의 기능을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호남선, 군산선 개통으로 유역의 수운 하항은 수운 하항 소상권 기능을 군산항에다 수렴해 왔으며 이로 연하여 충남 내륙 유역은 경제 사회적으로 공동화 현상을 가져왔다.
다섯째로, 교통로 변천에 따른 권역의 개편은 지리적 입지의 상대적인 이동을 말하며. 그러므로 교통은 지역의 공간구조를 이루게하는 기본적인 인자이다.
여섯째로, 수운을 비롯하여 토지, 농수산물 유통 취락 등 근대 전후의 자료를 아름답게 복원하여 금강 수운권을 박물관화하는 사업을 제안한다.

참고문헌
  1. 충청남도, 금강지(상). 1993.12. P.273~317
  2. 나도승, 금강 수운과 하항 취락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건국대학교 대학원(석사학위 논문). 1979.
  3. 조선총독부, 남한의 흉수. 1936. P.51
  4. 안상진, 금강유역의 수자원 개발 방향에 대하여, 1973.12. 한국수문학회지 제5권 2호, P.55~59
  5. 안상진 외 2인, 금강수계의 하천형태학적 특성인자에 의한 갈수량 추정, 1981.3. 한국수문학회지 제14권 1호. P.31~37
  6. 안상진 외 1인, 금강수계의 사행에 관한 연구. 1983.3. 한국수문학회지 제15권 3호 P.3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