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은 늘 조용히 시작된다. 홍수처럼 눈앞에서 범람하지도 않고, 태풍처럼 즉각적인 파괴를 남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뭄은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하고 오래 지속되는 상처를 남긴다. 홍수가 ‘단기 과잉 사건’이라면, 가뭄은 ‘마름의 과정’이자 ‘부족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2026년 병오년을 맞이한 지금, 가뭄이 반복되는 ‘자연현상’이 아닌 ‘사회적·경제적 시스템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구조적 재난’으로 성찰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가뭄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역사와 기후 체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어 온 상존적 재해이다.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백 차례의 가뭄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 후기에는 가뭄과 흉년, 민란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가뭄이 단순한 기후 현상이 아니라 국가 통치와 사회 안정성에 직결된 재난이었음을 보여준다.
근대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7~1968년 전국적 농업가뭄과 기근위기(강수량 평년 50%이하), 1994~1995년 역대급 폭염을 동반한 영·호남 생활·공업용수 대란, 2014~2015년 겨울 가뭄 심화로 인한 중부권(충청·강원·수도권) 가뭄, 2022~2023년 227.3일에 달한 역대 최장기 기상가뭄에 의한 광주·전남·경남지역의 장기 농업가뭄까지, 가뭄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다만 최근 가뭄은 빈도 증가, 지속 기간 연장, 지역 편중 심화라는 새로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APC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기후센터)의 다중 모델 앙상블 예측은 올해 4월부터 엘리뇨 전환가능성을 전망한다. 120년 전인 1906년 병오년의 대가뭄 기록에서는, 한반도 전반에 대가뭄·흉년이 들어 곡물 가격 폭등, 기근 기록 다수가 존재한다. 2026년 2월 현재 다목적댐, 용수댐, 농업용 저수지의 저수율은 모두 안정적인 상황이지만, 사전 대비는 언제나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물 관리 체계는 여름철 강수 집중을 활용한 댐·저수지 의존형 물 관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이 구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생활·공업·농업용수간 물 경쟁 심화, 수질 문제로 인한 하천유지용수의 증가, 미계측·소유역 가뭄 정보의 공백은 현재의 물 관리 시스템이 회복하지 못하는 상태로 정의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이제 가뭄은 단순한 강수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강수의 시·공간 불균형, 고온 지속에 따른 차단량·증발산량 증가, 토양수분 회복 지연, 지하수 집중이용으로 인한 건천화(stream drying) 가속 등 유역 단위 물순환 왜곡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우리나라 가뭄 대응 정책은 대체로 공급 확대 중심이었다. 다목적댐 건설, 광역상수도 연결, 용수 전환 운영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뉴노멀이 된 현재, 질문은 명확하다. “더 많은 물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최근 정부 정책은 가뭄 예·경보 고도화, 가뭄 단계별 대응 매뉴얼, 농업용수 스마트 관리, 물 재이용 확대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후 대응적 성격과 부처·용수 간 분절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가뭄은 닥친 후 극복하는 위기(crisis)가 아니라 상시적으로 관리해야 할 위험(risk)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유역 단위로 인식하고 운영해야 한다.
행정구역 중심의 가뭄 대응을 넘어, 표준유역 단위의 물순환 기반 가뭄진단과 대응이 필요하다.
둘째, 다원적 가뭄 지수와 디지털 전환은 필수이다.
강수부터 토양, 식생, 수문, 사회·경제 영향까지 여러 차원의 가뭄 신호를 함께 고려한 다중 영향 경로(multi-impact pathway) 가뭄지수와 위성·모델·AI를 결합한 자가진화형 디지털트윈 가뭄 감시 및 의사결정 체계 구축이 핵심이다.
셋째, 농업가뭄은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농업가뭄은 가장 먼저 발생하고 가장 늦게 회복된다. 스마트농업 관개효율 개선, 내한 작물 구조 조정, 지역 맞춤형 물-식량-에너지 배분전략 없이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넷째, 기술을 넘어 사회적 수용성과 거버넌스가 핵심이다.
용수의 용도간 전환(water use reallocation/water source switching), 절수 행동 역량(water-saving behavior capacity), 수량-수질-수생태간 우선순위 설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신뢰 기반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가뭄 연구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어느 정도의 가뭄이 닥친 것인가?”, “얼마나 부족한가?”에서, “어떤 가뭄이 오고 있는가?”, “어디가 언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진입하는가?”, “누가 가장 먼저 피해를 받는가?”, “어떤 선택이 미래의 가뭄을 줄이는가?”를 묻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학자는 정책의 뒤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정책이 아직 보지 못한 위험을 먼저 경고하는 존재여야 한다.
가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그 신호를 읽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가뭄 논의는 재해 대응을 넘어, 기후변화 시대 물 관리 패러다임 전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030년 전후 도래할 범용인공지능(AGI), 초인공지능(ASI) 시대의 가뭄 대응은 또 한번의 전환을 요구한다. 초지능형 예측과 시스템 자동 최적화를 통해 가뭄의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고 회복력(hydrological, agricultural, ecological, system, socio-institutional, drought resilience)을 단기화·극대화하는 체계로 진화해야 한다.
미래의 물관리는 더욱더 자연과의 수싸움(전략적 대응) 그리고 사회와의 기싸움(합의 형성)으로 결정될 것이다. 우리 학회가 그 전환의 중심에서 학문과 정책, 기술과 사회를 잇는 가교가 되어, 가뭄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논의를 이끌어가기를 기대합니다.
